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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지식, 경험 나눔

유익순 여사, 닮고 싶은 진정한 부인이자 엄마의 모습 !

by 곰곰책방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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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다가, 박동규 교수의 어머니 유익순 여사(박목월 시인의 부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여러 생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 유익순 여사의 품성에 깊이 감동받아서, 글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 정리해보고 나의 생각도 남겨보고자 한다.

 

 

박목월 시인과 유익순 여사

 

 

 

#1. 남편의 몰입을 위한 배려, 눈사람 같은 기다림.

박동규 교수(박목월 시인 아들)가 어렸을 적, 어느 겨울날 저녁상을 물리고 박시인은 아들에게 책상을 가져오라고 했다.  
책상이 따로 없기에 어머니는 밥상을 깨끗이 닦아서 내어준다. 아들은 아버지 뒤에서 아버지를 지켜보고 시인은 연필을 깎으며 시를 쓸 준비를 한다.

어머니께서 그때 어린 여동생(3개월된 아기)을 등에 업으며 “나는 옆집에 가서 놀다 오마” 하며 집을 나섰다. 밖에는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저녁이었다.
 
한참을 시작에 몰두하던 박시인이 끝마치고 돌아보니 아들은 등뒤에 있다가 잠이 들었고 시간은 통금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들을 깨워 통금이 다되어가는데 어머니가 안 돌아 오셨다며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박교수는 외투를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그때까지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고 여러 곳을 둘러보아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래 쪽 골목에 어머니와 친하신 분이 생각나서 그곳으로 가려는데 전봇대 옆에 사람 키만한 눈사람이 서 있었다.

그 옆을 지나려는데 “ 동규야, 어디 가니?”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께서는 동생을 등에 엎고 외투를 잔뜩 뒤집어 쓰고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 자리에 서 계셨다.

“ 아버지 시 다 쓰셨니?” 아버지의 시작이 끝날 때까지 동생을 업고 밖에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시작을 할 때 아이가 울며 보챌까 봐..눈사람이 될 만큼..
 
훗날 박동규 교수(박목월 시인 아들)는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그때 왜 그렇게 눈 내리는 겨울을 고생하며 밖에서 계셨었는지..
 
"아버지 때문에 고생 많았지요?”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 그래도 시를 끝내면 발표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날 보여주었단다.” 그 뿐이었다. 그렇게도 마음 씀씀이가 깊고 넓으신 어머니였다고 한다.

 

 

#2. 아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용서.. 칭찬으로

(내가 가장 감동받았던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박동규 교수(박목월 시인 아들)가 어릴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다섯살 여동생과 젖먹이 남동생, 어머니, 나를 두고 한강을 넘어 가셨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 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던 우리는 개천에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호박잎을 너무따서 호박이 자라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가족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 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 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 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3. 바람난 남편을 향한 따뜻한 진심, 챙김

박목월 시인이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그의 시를 좋아해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박목월 시인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언니는 포기하고 결혼을 했으나, 동생은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목월 시인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찾아온 사랑에,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단념하고자 노력도 했지만 그리되지 않았고, 결국 박목월 시인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었고, 추운 겨울날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에 나타났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유익순 여사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보퉁이에는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물론 그녀에 대해서도 유익순 여사는 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다.

그러한 유익순 여사 앞에서 그녀는, “사모님!”하고 울었다고 한다. 그들의 하숙생활은 그후 두 달 남짓 끌다 끝났다.
유익순 여사 앞에서 울었던 그녀는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결국 박목월 시인은 그녀와의 이별 후 제주에 좀 더 머물다가 1955년 초봄 가정으로 돌아왔다.
 
유익순 여사는 돌아온 남편에게 한마디도 탓하지 않고 반갑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또한 집으로 돌아온 박목월 시인은 전보다 더 충실한 가장이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3가지는 이렇다.

이 외에도 박목월 시인의 소중한 시집을 연구하라고 내어주고, 아들의 실수를 용서해주는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유익순 여사의 이러한 에피소드를 보며 느낀 것은... 정말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깊고 넓은 마음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특히나 목숨같이 소중했던 쌀자루를 잃어버린 아들에게 칭찬이라니, 나는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은 얼마나 더 어머니에게 미안했을까. 죄스러웠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어머니에게 죄송해서라도 더 잘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긴 교수가 되었다.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놀랐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 밖이었다. 어머니의 한 없이 깊고 넓은 마음.

너그러움과 용서가 아들의 존재를 감싸안았고, 아들은 자책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왜 그랬니하며 애를 혼내지 않았을까. 그럼 아이는 더 자신의 실수에 괴로워하며 힘들어했을 것이다. 

나는 순간의 감정의 노예가 될 때가 많다. 화가 나니 화를 내야하고, 아이가 이렇게 했으니 이런 마음을 분출해야한다고 하며 뿜어대지 않았는가... 최근의 나를 보며 반성한다. 우리 아들에게 미안하다. 

 

나도 좀 더 깊고 넓은 어머니의 마음을 소유하고 싶다. 유익순 여사처럼, 아들의 존재를 빛나게 세워주는 그런 어머니이고 싶다. 

 

바람 핀 남편에게 욕을 시원하게 해주고 때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걱정해주고 위로하며 챙겨준다니... 정말 나는 이 부분에서 그 깊고 깊은 마음을 닮아갈 수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였다면,,,? 그녀의 뺨부터 갈기지 않을까. 당연한 반응인데, 유익순 여사는 그 당연함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근데 유익순 여사가 이렇게 성숙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나는 개신교신자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삶의 태도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사람을 사랑하며, 용서하라 베풀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음을, 유익순 여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깊이 박목월 시인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의 또다른 사랑도 응원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진정한 사랑은 나를 채워주고 나를 만족시켜주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임을 유익순 여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익순 여사의 에피소드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어서 새벽에 써내려가본 글을 마무리하며, 나 또한 마음이 깊고 넓은 엄마가 되기 위한 여정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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